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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친족 간 혼인 금기의 이유

by uX

목차

친족 간 혼인(이하 근친상간)에 주목하게 된 계기

근친혐오: 선천 대 후천

 

원시 혼인의 풍습

약탈혼

여아 살해

족외혼

일처다부제

 

고대 근친상간과 현대 근친상간은 다른가

근친상간의 불합리함

현대의 근친금기화 이유

결론

 

 

 

서문: 근친상간에 주목하게 된 계기

일본의 사소설을 읽고 의문이 생겼다. (친동생과의 사실혼에서 받은 냉대를 다룸)

왜 사회는 왜 근친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걸까? 단순히 유전적 이유라면, 어디까지 선을 그어야 하는가? 장애인 결혼, 특정 질병인자 보유자의 결혼도 금지해야 하는가? (이는 나치의 우생학적 사고와 비슷하다) 근친상간보다, 오히려 만 35세 이상의 노산이 더 위험하지 않을까?

 

 

근친에 대한 혐오감은 선천적일까 후천적일까?

근친이란 단어를 들으면 어떤 감정이 드는가?

적지 않은 사람이 혐오감을 토로할 것이다.

 

이 혐오감은 선천적일까 후천적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잠시 원시 시대의 결혼 풍습에 대해 알아보자.

 

 

원시 혼인의 풍습

혼인의식에 포함된 약탈의 상징은, 역사성이 풍부한 지역과 동떨어져 있는 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겉은 다를지언정, 의미하는 바는 모두 같다. (John Ferguson McLennan, “Primitive Marriage”) , 실질적/형식적 약탈혼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전 세계 광범위하다.

 

신랑은 친구들과 함께ㅡ양쪽이 미리 정해 놓은 시간에ㅡ신부의 집으로 밀고 들어가, 어머니나 가까운 여자 친척 무릎에 앉아 있는 신부를 짐짓 폭력을 쓰는 체하면서 낚아채 달아난다. 

 

아풀레이우스는 그런 탈취 광경을 <끌려 가는 처녀>에서 생생하게 묘사했는데 그가 목격한 약탈의식은 일반 서민의 혼례식이었다. (Apuleius, de Asino Aureo, Book iv) 이러한 상징적 약탈혼의 근거는 헤로도토스와 플루타크의 저술 등으로도 뒷받침된다.

 

신부 약탈의 상징은 힌두교도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광범하게 남아 있다. 그런 관습이 당연시되는 이유는, 아예 힌두교도의 경전에 혼인의식의 일부로 신부 약탈 형식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비슷한 관습은 웨일스 지방의 경우, 19세기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덴마크와 스웨덴 왕가에서도, 왕이나 왕가에서 그런 행위를 한 것처럼 신하들도 똑같이 약탈행위를 벌였다. 스칸디나비아지역에 기독교가 전래하기 까지 모든 남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여자를 약탈한 후 칼로 위협하면서 혼인했다.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약탈혼의 관행이 그대로 지속되, 혼례를 치르기 위해 교회로 가던 신부들이 강제로 끌려가는 일이 많았다. 때문에 혼례식 행렬에는 무장한 한 떼의 남자들이 뒤따랐고,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밤에 혼례식을 갖는게 보편화됐다.

 

고틀랜드에 있는 오래된 후사비 교회에는 지금도 창이 한 무더기 쌓여 있는데, 이 창에는 횃불을 꽂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신랑 들러리들은 횃불이 꽂힌 창들을 들고 혼례식장을 밝힘과 동시에 신부 탈취에 대비했다. 기독교가 전파되고 문명의 수준이 비교적 높은 상태에서도 여전히 그런 무법성이 횡행했던 것을 보면, 원시적인 옛날에는 얼마나 난폭했을까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전세계 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약탈혼의 흔적

원시시대의 초자연적 존재: , 악귀, 악령, 거인 등은 마을로 쳐들어와 강탈과 노략질을 일삼고, 사람을 잡아먹으며, 여자를 훔쳐간다.

 

약탈혼의 기록은 한국-삼국시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타 나라와 같이, 관련 문학 또한 존재한다.

 

통일신라 가요 해가海歌: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 다른 이의 부녀를 빼앗은 죄가 얼마나 되는가 / 네가 만약 거역하여 바치지 않으면 / 그물로 잡아 구워먹고 말리라

 

 

약탈혼의 원인

이제 우리는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광범하게 남아 있는 약탈 형식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그 원인은 무엇인가?

 

이는 원시시대의 무법성이 지극히 당연했음 에서 온다. 그런 무법성은 여자뿐 아니라 다른 종류의 ‘재산‘에도 그대로 적용돼,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자는 자신이 취한 것을 그대로 지닐 수 있었다. , 원시 시대에는 전쟁에서 사로잡은 여성들을 거의 예외 없이 아내로 삼거나 그 이하의 신분 상태로 부렸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진부한 사실이다.

 

절취나 폭력으로 아내를 취하던 풍습이 거의 예외 없이 행해질 정도로 보편화되었고. 따라서 아직까지도 일부 국가에선 ㅡ온전한 혼인의 성사를 위해ㅡ 약탈하는 시늉을 한다.

 

이는 ‘혼인=약탈’ 개념의 존재를 암시한다.

따라서 어떤 부족들의 경우 아내로 삼기 위한 여성ㅡ반드시 다른 부족의 여성ㅡ을 약탈하는 행위를 제도화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제도의 기원이, 오로지 낯선 부족이 소중히 생각하는 대상을 빼앗아 차지하겠다는 야만인의 본능적 욕구 때문일까? 평화적인 방법이나, 부족 내 혼인은 (고대엔 부족내의 결혼이 터부됨) 왜 하지 않았을까?

 

그 제도는 보다 깊은 요인에서 비롯되었음이 분명하다.

, 이들 부족의 환경적 요인과 친족에 대한 관념. 부족간의 결합형태 등에서 근원을 찾아봐야 하는 것이다.

 

<매듭>

우리는 현대까지 남아있는 약탈혼의 상징이, 원시시대에 만연했던 약탈혼에서 기원했음을 알았다. 이제 왜 약탈혼이 원시시대에 가장 많은 선택됐는지 이해하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여아 살해에 대해 살펴보자.

 

 

여아 살해

여아 살해ㅡ세계 도처에 현재까지 존재하는 비문명 사회의 보편적 현상ㅡ은 하나의 제도로 널리 퍼져있다. 일부 족외혼(=부족 외부 혼인)을 채택한 부족은, 첫 아이가 딸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여아를 죽이는 걸 관습했다.

 

적들에게 둘러싸여, 생계를 위해 허덕거리던 부족에게 남아는 부족을 지키고 먹을 것을 찾는 힘의 원천이지만 여아는 취약함의 상징이었다.

이런 잔인한 풍습이 이어지면서 원시 부족들은 젊은 여자가 적은 상태 ㅡ 어떤 경우에는 거의 없는 상태 (맥컬로크 대령은 1849년 인도 동부 변경지역 의 푸이롱마이에 갔다가, 그 마을에 여자 어린이가 한 명도 없다는 걸 확인했다) 에 처한다. 그에 따른 부족 내의 성비 불균형은, 부족간에 서로 여성을 약탈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필요에 따라 생겨난 관습은 그런 풍습을 따르는 부족들에게 언젠가는 편견을 심어주기 마련이다. 혼인과 관련된 편견이 흔히 그렇듯, 같은 부족 내 여성과 혼인해서는 안 된다는 편견은 종교적 편견만큼 깊이 새겨졌다.

 

인류가 예술을 논하고 미래를 생각하는 관습을 형성하기 전. 원시, 혹은 생존을 위한 투쟁 단계에선, 초기단계의 가혹함을 피해갈 수 없었고, 그런 체험이 종족 특성과 관습에 미치는 영향을 막지 못했다.

 

먹을 것과 안전을 찾기 위한 초기의 투쟁은 여러 가지 결과를 낳았지만, 가장 두드러진 건 성비 균형이다. 용감하고 사냥솜씨가 좋은 남자가 필요하고 또 귀하다 보니, 건강한 남자 어린이를 가능한 잘 키우는 일이 모든 집단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남자 아이나, 여자 어린이를 키우는 일은 전자와 같은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이들은 투자 받지 못했고 (=식량 미배분) 도태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불과 1세기 전에도 아사는 전 지구적인 사망원인이었다. 원시사회보다 '발달'했다 말할 수 있는 조선시대에도 ㅡ 그 나름 태평성대라고 자찬하는 세종 시대조차 ㅡ 아사자가 많았다)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여아살해 관습의 기원은 이런 이유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오지에 이런 관습이 잔존하고 있는 사실이 가끔씩 드러날 때 마다 전세계는 큰 충격을 받곤 하는데, 이는 싸움과 궁핍으로 점철된 원시시대에는 어디서나 찾을 수 있었다.

 

 

집단 내 평화를 위한 족외혼과 일처다부제

여성의 수적 감소가 여성의 중요성을 높였다.

 

어느 집단에서나 남자들은 여자 문제로 다툼을 벌였고, 따로 떨어져 나가 서로 적대적 분파가 되거나 무관심한 태도로 난교에 골몰했다.

 

성비 불균형은 부족 내 갈등을 유도했고. 그런 싸움이 거듭되면서, 집단 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족외혼이 필요케 된다.

 

여자 가뭄은 곧 일처다부제를 낳았다.

일부를 예시하자면 타키투스 시대 때 게르만족 (German xx, Latham’s EDN. P67), 메디아의 일부 지역 – 여자는 여러 남편을 거느릴 수 있고, 5명 이하의 남편을 거느리는 건 경멸의 대상이 됨 – 아일랜드의 픽트인, 인도인, /현대의 티벳인 ㅡ 일처다부제가 보편적이고 한 여자의 남편은 대게 형제 사이다 ㅡ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부족단위 생존의 관점에서 바라본 족외혼

족외혼 풍습은, 농경사회 이전, 여러 이유로 강제됐다.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동맹의 필요성이다. 부족의 생존이 활발한 교류와 동맹 관계에 좌우되기에, 족외혼이 절실케 되었다. 동족 결혼을 금하는 것은 다른 집단과의 결혼을 유도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근친결혼이 생물학적으로 위험하기 때문이 아니라, ()족 결혼이 사회적으로 득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혼인을 통해 유통되는 교환이 혼인의 진정한 목적 중 하나이며, 이것에 입각해 사회 집단들은 상호 관계를 확립한다.

언어적 차원의 교환, 여자 교환과 더불어 물질 교환 역시 단순한 거래를 의미하지 않는다. 물질 교환은 감정, 의무, 가치관 교환을 수반하고, 안정적인 사회를 구성하는 통합 원리로 작용한다.

(: 아프리카 A부족은, 자신보다 흉폭하고 척박한 지역에 사는 B부족과의 평화를 위해, 일부로 쌀과 도자기를 교환했다. A부족의 도자기들은 모두 B부족이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후 두 부족의 대립이 심화되고, 서로 적대상태로 바뀌자, A부족은 도자기를 스스로 만들기 시작했다.)

 

, 원시시대 근친결혼의 금지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만한 양심의 가책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 관계 토대를 이루는 교환가치를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고대의 근친상간과 현대의 근친상간은 다르다?

기막히게도, 전 세계적에 광범위한 근친금지-규정은, 대게 혈연관계 그 자체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들이 근친이라 정의한 건, 같은 부족내 결혼으로, 다른 부족과의 결혼을 강제했다.

(인도 북부의 소다인, 싱가폴의 베두안다 칼룽인, 아메리카 인디언 등. Descriptive Ethnology, Vol i p80)

 

 

근친상간의 불합리함

자기 누이와 결혼하는 것이 불합리한 까닭은, 민족학자 마가렛 미드가 언급한대로, 그것이 매형이나 매제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현지조사에서 “왜 당신은 근친결혼을 금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자, 한 추장은 “내 아들이 내 딸과 결혼하면, 그것이 내게 무슨 이익이 되는가?”라고 반문한다. 매형이나 매제가 없다면 누구와 함께 물고기를 잡거나 사냥하겠는가? (Ibid, p556)

근친결혼의 금지는 어머니나 누이 또는 딸과의 결혼을 금하는 규범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머니나 누이 또는 딸을 타인에게 제공하도록 강요하는 규범이다. (Ibid, p552)

근친결혼은 도덕성을 따지기 전에, 사회적으로 불합리하다.

 

낯선 사람이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방법은 결혼을 통해 그들을 동지로 바꾸는 것이다. 결혼에 대한 이러한 태도가 아직 서구 사회의 귀족, 왕족 가문이나. 한국사회 재벌과 정치인 자식 간의 정략결혼 등으로 남아 있는 것은 결코 역설적이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 근친을 금지된 계기

1. 동물 사육

근친 교배의 위험이 정확히 측정된 건, 19세기-현대 과학의 도래 이후다. 동물들을 사육함으로써, 인간들은 근친교배의 결과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2. 푸코가 말하는 억압의 방식으로써 금지가 되었다.

 

 

결론

생각 외로 근친의 유전적 취약함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고대 이집트나 옛 유럽에서, 순수성을 명목으로 근친상간이 자행될 수 있었다. 영국 노퍽이나 아일랜드의 경우, 농경사회의 도래 후 족외혼에서 족내혼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근친상간을 장려한 까닭이다.

 

설사, 크게 무리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겐 타인의 자유를 탄압할 자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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